단편들

창조주 하나님(God the Creator)

stevision 2012. 12. 8. 17:19

(2007.12.11 인터넷에 공개)

 

창조주 하나님                                      English

 

 

 

목차

1. 홀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2.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3. 삼위일체 하나님

4. 인간이 되신 하나님

5. 창조주 하나님

 

 

 

신학 서적들을 들여다보면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불필요한 철학을 곁들여 장황하게 설명을 해 놓았지만 정작 마음이 텅 비어있게 만드는 주장들도 있다. 루터가 스콜라 철학(신학)의 시시콜콜한 논리에 진저리가 나서 다시금 복음을 쉬운 말로 잘 정리해 놓았다. 어렵지 않으면서도 영의 양식이 되게 하는 루터의 글은 성경처럼 많은 자들에게 감동을 준다. 존재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다룬 어떤 철학서적을 돈주고 사서 보며 ‘난 성경 말씀의 단순성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여백에다 적어놓은 것을 내가 다시 그 책을 훑어보다 발견하고는 혼자 웃은 적이 있다. 존재하면 존재하는 거지 뭐 그렇게 이유가 많나? 믿기 싫어하고 인정하기 싫어하면 궤변이라는 몹쓸 논리가 등장해서 사람들의 시간을 갉아먹는다. 대학 때 자연과학 분야를 공부했던 내가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신학을 하고 그 후에도 신학서적을 읽으며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 바가 있어 그간의 생각을 정리하여 이 글을 쓴다. 과거에 생각했던 것과 달라진 내용도 있고 새로 깨달은 내용도 있다. 가급적 자연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언어와 틀을 벗어나 신학적 품새를 유지하려 신경 좀 썼다. 주요 내용은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이야기이다. 특히 물질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해명해 놓았다. 이 글이 이 시대 신학에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1. 홀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신비는 텅 빈 공간만 있어야 함에도 세상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다고 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기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채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한다. 세상이 존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홀로 계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셨다. 그분께서 다른 존재에 의해 존재하게 되신 분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다만 경의를 표할 뿐이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무엇으로 분석한단 말인가? 시작이 없으신 분을 어떻게 우리의 지적 능력으로 분석할 수 있단 말인가?

일반적으로 존재라 함은 실제로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디에 있냐에 따라 존재 방식도 달라진다.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자는 다른 데에 있지 않고 스스로가 스스로 안에 있다. 예를 들어 공간을 살펴보자. 공간은 다른 것 안에 있지 않고 스스로가 스스로이다. 시간도 마찬가지이다. 시간도 스스로가 스스로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가 스스로이시다. 즉 시공의 존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4차원 시공간(時空間)과 다른 ‘하나님의(자신의) 존재차원’ 안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엄격히 말해 시간은 공간에 종속적이지 않고 공간도 시간에 종속적이지 않다. 하나님께서도 시공(時空)에 종속적이시지 않으시다.

그런데 정말로 인간의 이해를 뛰어 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현재의 시공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라는 시각에 나타나 있는 무한한 크기의 공간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다는 말이다. 왜 이게 가능한지 인간은 알 수 없다. 분석할 수도 없다. 그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우리 몸을 비롯한 물체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다. 현재라는 시각에 바로 여기라는 공간 안에 물체가 존재하는 것이다. 물체는 시간과 공간과 하나님 이 셋의 영향 하에 있는 존재이므로 절대로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 이에 반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오직 ‘현재’에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공간 그 어디에도 계시지 않으실 수 있으시다. 공간 안에 안 계시는 동안에는 현재라는 시간 안에도 안 계시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현재라는 시각에 공간 안에 안 계신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안에 ‘현재’ 계신다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은가?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재’라는 시각에 스스로 계시는 것이지 결코 시간의 흐름에 의해, 시간에 떠밀리어 현재 계시는 분이 아니다.

물체는 과거의 것과 현재의 것 사이에 근본적 비동일성에 노출되어 있다. 아무리 1초 전의 물체와 현재의 물체가 원자 구조까지 동일할지라도 이전의 물체가 시간을 뚫고 현재라는 시각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이 둘 사이의 동일성은 의심쩍다. 시간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누가 시간을 뚫고 3초 후에 미리 가 있을 수 있나? 좀더 근본적으로 고찰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엄밀히 생각하면 그렇기 때문에 현재라는 시간에 계속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물체는 자명한 현상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영원 전의 그분께서 바로 현재의 그분이시다. 영원 전부터 스스로 계셨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힘에 의해 영원한 미래까지 확실히 계실 것이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과 그분의 존재는 무관하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현재의 시공에 자신의 존재를 두시는 여유를 보이고 계신다. 어쩌면 현재 우리가 만나는 하나님은 영원 중에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현재 모습은 아닐까?

시간과 공간 없이도 스스로의 안에 계시는 하나님께서 시공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비 그 자체이다.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공간적 요소를 자신의 존재의 구성요소로 삼지 않으신다. 그럼에도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시다. 물체는 공간적 요소가 자신의 존재 요소이므로 공간 안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혀 공간적 요소를 자신의 존재요소로 삼지 않으심에도 공간 안에 계실 수 있으시다. 이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므로 그냥 사실로 받아들이자.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두시는 순간 그분의 존재는 공간성을 자신의 존재 요소로 갖게 된다. 물론 이 공간적 요소를 떨쳐버리시는 순간 그분께서는 공간 어디에도 계시지 않으신다. 그런데 성경이 하나님을 순수한 영(靈)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의 본래 특징을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영은 시공에 관계없이 스스로 안에 존재할 수 있는 존재이고, 시공 안에 자신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 존재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공간에 드러내 보이시는 순간 그분의 존재는 공간성을 덧입게 되고 우리가 볼 때 그분의 존재 요소에 공간성이 추가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면 스스로의 안에 계시는 하나님과 공간적 요소를 덧입으신 하나님은 분명 동일한 분이신데, 존재적 차이가 생긴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물론 이 경우 한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안에 계시면서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공간에 두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엄밀히 말해 공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는 본(本)하나님(The God Proper)의 존재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본하나님께서 시공에 무관한 분이시기 때문에 시공에 나타난 그분의 존재는 본하나님의 존재와 구조적으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고, 따라서 편의상 시공에 확장된 하나님의 존재를 성령(The Holy Spirit)이라고 하자. 따라서 공간으로 확장된 하나님의 존재는 공간적 요소를 자신의 존재요소로 삼으신 성령이시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실 때 그분께서는 스스로의 존재를 떠나 공간 안에만 계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존재를 떠나시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분께서는 자신의 존재의 확장을 통해서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시다.

공간으로 확장된 하나님의 존재를 성령이시라 부르는 이유는 성경이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세상을 움직이시고 다스리신다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은 파송된 존재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신다. 공간에 파송된 성령께서는 공간적 존재를 가지시고 공간 안을 움직여 다니실 수 있으시고, 동시에 여러 곳에 임하실 수 있으시다. 이 문제는 삼위일체론과 관련이 있다. 삼위일체와 위격(位格) 문제는 나중에 더 논하기로 하자. 일단은 편의상 공간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존재를 성령이라 부르고, 그 성령께서는 하나님 자신이시고,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정의해 놓자.

무(無)란 무엇인가? 무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무는 빈 공간이다. 물론 시간과 공간이 존재이기는 하나 이들 스스로는 스스로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다만 다른 존재자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점령당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께서 최우선적 존재자이심을 고려 할 때 텅 빈 공간을 존재의 반대인 무(無)라 아니할 수 없다. 다른 존재를 수용할 수 있는 존재를 무(無)라 해도 무방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유(有)이시고 텅 빈 공간은 무(無)이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존재하신다. 빈 공간은 무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령을 보내시어 전(全) 공간을 점령하셨다. 오직 공간 안에 한 분의 하나님만 계신다. 성경은 다른 신은 존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참된 신이라 증거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크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이나 공간에게 있는 어떤 가능성으로 존재하게 되신 분이 아니시다. 시간이나 공간이 가진 어떤 가능성으로 하나님이 존재하시게 된다면 공간에 여러 신들이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홀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한다. 둘 이상의 하나님이 안 계시고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신다는 사실도 참으로 큰 신비가 아닐 수 없다. 그렇잖은가? 한 하나님께서 스스로 존재해 계신다면 동일한 존재 원리로 인해 다른 하나님도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의 존재 원리를 알고 계신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시는 그 하나님께서는 오직 자신만이 홀로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그분께서 스스로 존재하는 여러 하나님들의 연합체도 아니시고, 또한 여러 하나님들이 연합을 이뤄 한 자아로 통합된 한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도 된다. 참으로 큰 신비이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는 시공을 절대적으로 초월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가 시공에 종속적일 때에는 여러 하나님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 또 오직 한 하나님만 계시다는 말은 오직 유일무이하게 한 하나님만 계셔야하는 필연성이 하나님의 존재요소에 있다는 말이다. 한 순간에 텅 빈 공간은 유일무이하게 하나만 존재하는 필연적 요소를 자체에 갖고 있다. 두 공간이 동시에 존재할 가능성은 아예 없다. 그와 같은 필연적 유일성이 하나님께도 있다. 공간을 생각하면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무한한 크기이고,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고, 그 자체가 필연적으로 단일한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하나님의 필연적 능력의 무한성과 필연적 자존성과 필연적 유일성은 하나님 자신께서 소유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그러한 하나님의 존재로 인한 결과는 분명히 체험하고 있다. 인간의 지혜는 오직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 오직 한 분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가치가 무한대가 된다.

공간은 그 속성상 현재라는 시각에 필연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며 단 하나의 절대공간을 이룬다. 이와 같이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도 현재라는 시각에 필연적으로 스스로 존재하며 단 한 분으로 계신다. 엄밀히 말해 1초 전의 공간은 현재의 공간이 아니다. 공간이 시간을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1초 전의 하나님 바로 그 분이 현재에도 존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뚫고 현재에 존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이것이 바로 영이라는 존재의 특징이다. 영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자기동일성이 유지된다. 이게 바로 살아있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다. 공간은 영원히 죽은 존재이다. 현재라는 시각에 필연적으로 나타났던 현공간은 순간만 존재하다 영원히 사라진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홀로 살아 계신 존재로서 영원히 자기동일성을 유지하시며 스스로 존재하신다.

자신의 존재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본하나님(The God Proper)이라 규정했을 때 공간 안에 삼차원적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는 본하나님 자신의 확장이다. 공간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갖춘 분이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을 좀 더 깊게 하면 이 경우 한 하나님께서 동시에 두 하나님들로 존재하시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갖추신 확장된 하나님을 인식하실 수 있으시고, 확장된 하나님께서는 공간에서 자신의 본자아를 인식하실 수 있으시다. 공간 안에다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와 같은 일은 가능하다.

물론 그와 같은 경우는 우리 인간들에게 매우 생소한 상황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동시에 두 곳에 둘 수 없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은 가능하다. 당신의 오른손이 차가울 때 당신의 왼손이 그 차가운 오른손을 감쌀 수 있다. 거울을 매개로 해서 당신의 오른쪽 눈은 왼쪽 눈을 볼 수 있다. 왼쪽 눈도 오른쪽 눈을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이 주는 오른쪽 장갑을 당신의 왼손이 받아 오른손에 전달할 수도 있다. 이와 비슷하게 한 하나님의 자신의 존재의 확장은 본하나님과 확장된 하나님 사이에 나와 너의 관계를 유지하며 한 하나님으로 존재하시게 된다.

본하나님께서는, 당연한 말이겠지만, 완전한 신적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을 갖고 계신다. 그런데 공간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도 완전한 신적 자아의식을 갖추고 계실 것인데, 이 경우 두 하나님들이 아니시고 그럼에도 오직 한 하나님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본하나님과 확장된 하나님이 존재적으로 분리 불가능하게 연결된 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른손과 왼손을 각각 더운물과 찬물에 동시에 넣어보자. 그러면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서 독립적으로 ‘더운’ 감각과 ‘찬’ 감각을 느낀다. 이를 좀 더 깊게 생각하면 오른손과 왼손은 낮은 단계의 ‘자아의식’을 갖고 각기 다른 환경에서 느끼며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일한 한 하나님께서 동시에 본하나님과 확장된 하나님으로 계실 경우 각각 완전한 자아의식을 갖고 계시지만 한 하나님께서 동시에 두 자아의식들을 갖는 경우이므로, 이 경우 오직 한 의지(will)만이 동시에 두 자아의지들 안에 있다고 해야 한다. 하나의 자아의식은 독립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본하나님과 확장된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다른 생각을 하실 수 있으시지만 이 두 생각들은 한 하나님의 두 생각들이므로 그 두 생각들 안에는 단 하나의 의지(will)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생각들 사이에는 상호 모순이 있을 수 없고 상호 대립이 있을 수 없다.

손으로 당신의 인격이 표현될 수 있다. 오른쪽 사람에게 당신의 오른손만 볼 수 있게 하자. 왼쪽 사람에게는 당신의 왼손만 보이게 하자. 당신은 두 손으로 동시에 양쪽 사람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다. 제 3자가 이 상황을 봤을 때 하나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두 인격을 가진 채 두 사람을 동시에 대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 경우 가능성의 관건은 것은 동시에 두 군데에 자신의 온전한 인격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다. 홀로 영원히 계신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자신의 존재를 자신의 안과 공간에 동시에 두실 수 있으시고, 두 곳에서 완전한 신격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으시다. 그렇다고 한 하나님께서 두 하나님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여전히 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한 하나님이시라고 해도 두 자아로 동시에 존재하시며, 이 두 신적 자아들께서 나와 너의 관계를 유지하실 수도 있으시다.

오직 이 하나님만 홀로 존재하신다. 시공은 빈 껍데기일 뿐이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다. 시간은 하나님께서 영원한 분이심을 증언하고 있고, 공간은 하나님의 무한한 광대하심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은 인간이 들어설 수 없는 지성소이며 시공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곳이다. 시공이 무한한 존재이나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에게 남아 계시면서 동시에 무한한 시공을 다 자신의 존재로 채우고 계신 분이시다. 시공이 무한한 존재라면 하나님께서는 무한에다가 무한을 곱해서 나온 무한에 해당하는 분이시다. 온 우주를 아름다운 구슬로 다 채워보시라.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보석이 있는 곳에서 동시에 당신의 무한한 능력을 소유하신 채 존재해 계실 수 있으시다. 무한한 능력을 무한한 장소에서 동시에 보이실 수 있으시니 무한에다가 무한을 곱해서 나온 무한에 해당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말이고, 그럼에도 여전히 스스로의 안에 계시며 본래의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조금도 잃지 않고 계시니 그 하나님께서는 무한을 무한히 초월해 계신 분이시다. 할렐루야!

 

 

 

2.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하나님도 무한한 신비이시고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신 그분의 능력도 무한한 신비이다. 그런데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도 무한한 신비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려 마땅하다!

성경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였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시니 인간을 비롯한 만물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만물의 재료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거두시면 세상은 무(無)로 돌아감을 알 수 있다. 공간 안에 하나님께서 창조를 감행하신 것은 그분께서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켜 공간 안에다 두실 수 있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 계실 수 있으셔야만 공간 안에서 일을 하실 수 있으시고 공간 안에서 말씀을 발하시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으시다. 편의상 공간 안에 계신 하나님을 성령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이라는 존재형식을 통해 공간 안에다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 성립된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이냐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이 필요하다.

 

 

1. 영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2.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도 하나님처럼 하나님 말씀을 세상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경험상 물질은 물질이고 영은 영임을 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홀로 계셨음을 감안하면 피조된 물질과 영은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질은 영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세상으로 인식하신다. 즉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세상이 우리에게 나타난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타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우리가 가진 오감이라는 인식 능력이 원래 영이신 하나님 안에 있던 능력이었으며, 그러한 인식 능력이 우리에게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영과 육체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며, 세상 인식의 주체는 바로 물질인 육이 아니라 영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외부에 있는 물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 안에 있는 감각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셨을까? 그렇지 않음이 분명하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다. 이러한 인식 능력이 원래 하나님 안에 있었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아 인간의 영이 세상을 하나님처럼 세상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인식을 살펴보면 우리는 삼차원적으로 감각을 느끼고 있다. 이는 우리의 영이 삼차원적 분포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우리의 영의 삼차원적 구조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삼차원적으로 계시며 일을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의 몸은 물질이므로 일단 접어 두고, 우리의 영의 기원을 생각해보자. 우리의 몸의 기원은 공간에서 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면 우리의 영은? 우리의 영은 본하나님의 존재와 사뭇 다른 구조를 갖고 있다. 본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자신 안에 계시는 영이시지만 우리의 영은 공간 안에 삼차원적 구조를 갖고 있고, 이는 공간 안에 계신 확장된 하나님인 성령과 비슷한 존재구조를 갖고 있다는 말이 된다. 사람은 물질(物質, material matter)을 가지고 형상 있는 물체를 만든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께서는 영질(靈質, spiritual matter)을 가지셔서 생명체인 인간의 영을 만드신다고 말할 수 있다. 물질이 필요한 구조를 갖추면 기타도 되고 가방도 되듯이 영질이 필요한 구조를 갖추게 되면 생령(生靈, a living spirit)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영이 영질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제조과정에 의해 그분의 형상에 맞는 구조를 갖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으로 인식하게 되는 생령이 되는 것이다.

물질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에 독립하여 스스로 있던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존재의 유출도 아니다. 그러나 영질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므로 물질과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를 부여받는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의 영은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존재하게 된다. 또 말라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영질을 소유하고 계셨다가 아담의 영을 만드셨음을 알 수 있다(말2:15). 그런데 이 영질은 하나님께서 (입으로) 말씀하심으로 존재한 게 아니라 (입으로) 부심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공간 안에 당신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는 공간 안에 계시며 공간에다 영질을 두실 수 있으시다. 근본적인 신비와 기적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동시에 공간 안에다가도 두실 수 있는 것이고, 이에 못지 않은 신비와 기적은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케 하는 힘으로 자신과 다른 영질이 존재케 하신 것이다. 이 영질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힘으로 만드셔서 자신의 소유로 삼고 계신 것이다. 이 영질은 하나님의 존재의 유출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생성된 것이다. 공간 안에 계신 성령도 삼차원적 존재이시다. 영질은 바로 이 성령과 같이 삼차원적 존재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공에 나타나셔서 그곳에다 영질을 생성하셨다. 그러므로 인간은 절대로 본하나님이 될 수 없고, 공간에 파송된 하나님(성령)과 공간에서 만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영혼을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공간에 왕림하셨던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공간의 옷을 입으셨다. 인간이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은 필연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공간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고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 안에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많아진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전술했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존재적 필연성에 의해 오직 한 분만 존재하신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자비와 은총으로 한 인간에게 무한한 능력을 주시더라도 그 자는 하나님처럼 능력 많은 인간일 뿐이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영질은 삼차원적 존재 구조를 갖고 있으므로 결코 본래적 의미의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은 원래 공간적 존재구조를 갖고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자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하나님의 은혜라 부른다. 맞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 나타나신 것도 은혜이고, 영질을 생성케 하신 것도 은혜이다. 영질이 인간 영혼이 되어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에도 영질을 만드신 것이 참으로 크신 아량과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영질을 만드셨다고 해서 인간을 신적 존재라고 하는 자는 자식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미련한 자이고, 인간의 모든 죄를 영질을 만드셔서 인간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께 돌리는 자는 자식의 죄를 아버지에게 돌리는 미련한 자이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호의와 은혜와 기적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이간질하는 데 사용하나? 그런데 인간은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 위격이신 성자께서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또 인간은 ‘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나’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문제는 후에 더 상세히 논하기로 하자.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을 동시에 생각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니 그 말씀이 세상으로 인간에게 다가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좋은 비유가 있다. TV 방송국에서 전파를 통해 각 가정에 영상과 음향 정보를 보내니 각 가정의 TV 수상기에 그 정보가 화면이 되어 나타났다. 여기서 TV 방송국은 하나님께 비유되고, 전파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유되고, TV 수상기는 인간의 영에 비유된다. TV 방송국과 전파와 TV 수상기를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 TV 수상기 화면에 나타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나? 그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세상은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세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인간의 영이 동시에 고려되어야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의미가 여러 가지 있으나 인식 능력의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으로 재구성할 수 있는 인간의 영의 구조와 인식 능력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뜻이다.

말씀이란 무엇인가? 말씀에는 화자(話者)의 의지(will)와 정보(내용)가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공간에 현존해 계시며 그 공간의 어느 지점에서 ‘이러이러한 물체가 이곳에 있다’고 하신다. 그럴 때 하나님 자신께서도 그곳에 그러한 물체가 있다고 인정하시고, 인간도 그러한 물체가 그곳에 있다고 인정하게 된다. 당신의 눈앞에 뭔가가 보이는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시각 그곳에 그러한 물체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 물체는 공간적으로 구조를 갖춘 하나님의 의지 덩어리이다. 공간을 잽싸게 움직이는 빛도 공간 안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의지 덩어리이다. 당신 앞에 거리를 두고 있는 물체가 있는가? 바로 그 물체가 있는 그곳에 그러한 모습을 가진 물체가 존재한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있다. 빛은 빛의 속성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의지 덩어리이고, 소립자는 소립자의 속성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의지 덩어리이다. 속성이 바로 의지의 내용(정보)이다. 그러므로 빛과 인간의 몸을 비롯한 만물은 삼차원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지 + 정보)이다. 하나의 입자에 하나의 존재의지가 필요하다고 하자. 또 하나의 말씀에 하나의 의식이 필요하다고 하자. 가만히 생각해보자. 세상에 얼마나 많은 소립자들이 존재하나? 그걸 고려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수의 의식을 갖추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공간 안에 자신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신 무한한 의식을 소유하신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해 놓으시고 멀찍이 떨어져서 세상을 관망하시는 모습은 신화적 상상이다. 공간 안에 하나님의 현존이 없다면 우리의 몸도 존재하지 않고 눈앞의 세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몸 자체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의지(will)임을 고려한다면 나보다 하나님께서 내 몸에 더 가까이 계심을 알 수 있다.

현 시각에 오직 하나의 공간만 존재한다고 이미 밝힌 바가 있다. 그리고 현공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했다 영원히 사라지고 새로운 공간이 필연적으로 현재라는 시각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도 말한 적이 있다. 따라서 바로 전의 공간과 현공간은 존재론적으로 전혀 별개의 것들이다. 그러면 영질이나 물질은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나? 그렇다고 봐야 한다. 영질은 그 자체가 영적인 존재이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시간을 뚫고 항상 현재에 존재하시며 자아 동일성을 유지하듯이 영질도 영적인 특성을 갖추고 있어서 항상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 그러나 영질은 자존하는 게 아니므로 하나님께서 항상 보존하고 계실 때에만 영적 특성을 갖추고 있어서 자기 동일성이 유지된다. 물질은 하나님의 의지 덩어리이므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를 고려할 때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자기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봐야 한다. 영과 육으로 구성된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관계없이 하나님 안에서 항상 자기동일성이 유지된다. 즉 과거 자신이 한 행동이 현재에 자신이 받을 상과 벌의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기억력이 있다는 것이 영질의 자기 동일성과 나아가 하나님의 자기 동일성까지 증명한다.

우리에게 정말 신비로운 게 뭔지 아시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난 감각 내용이다. 색깔, 소리, 촉감과 같은 것은 영이 직접 느끼는 것인데 참으로 묘하고도 묘하다. 이것은 영에게 주어진 능력이므로 달리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우리가 빛과 소리를 감지하기 위해 먼저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 계셔야 하는 무한한 기적이 필요하고, 다음에 그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다 자신의 존재를 펼치실 수 있으신 무한한 기적이 필요하고, 그 다음에 공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다른 영질을 내시는 무한한 기적이 필요하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구성되어 있다. 영과 육은 존재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에 있으므로 이 둘은 혼합될 수 없고, 다만 동일한 공간에 병존한다. 이를 영이 육을 소유하고 있다거나 육에 영이 깃들어 있다고 표현한다. 이런 육과 영의 결합을 영물체(靈物體, a spirody)라고 정의하자.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물체는 영물체다. 그 누가 소나 양이 영질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나? 더 나아가 인간의 영질과 소의 영질이 존재론적으로 다르다고 증명할 수 있거든 해보시라.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인을 공경하는 소가 영질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할 자격도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또 문제가 된다. 소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고 말할 수 있나? 난 모른다 궁금하신 분들께서는 하나님께 직접 여쭤보시라. 혹시 아무런 대답을 안 해주시면 몰라도 되어서 그런 것이니 더 이상 묻지 마시기 바란다.

인식의 주체를 영으로 해놨으니 인간의 각 세포에는 영이 깃들어 있어서 그 세포가 느껴야 할 내용을 그 세포에 깃들은 영이 느낀다고 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인체의 구조와 영의 구조는 같다고 해야 한다. 이와 같이 영질이 육체의 구조와 완전한 일치를 이룬 구조를 갖게 된 것을 영이라 한다. 육체의 모든 감각기관의 세포는 감각을 일으켜 스스로 느낄 수 있는 영세포(靈細布, spiritcell)와 일대일로 대응되어 같은 공간에 있게 된다. 육체의 감각 세포는 영세포가 느낄 감각의 내용을 정하고 그 내용에 따라 영세포가 감각작용을 일으킨다. 육체는 물질세계의 일부가 되어 영이 감지할 정보를 정하는 역할을 한다. 영은 의지를 발생시켜 육체를 움직인다. 이 때 영과 육체는 존재적 간격이 있으므로 영의 의지에 따라 육체가 움직이는 것은 공간 안에 계신 하나님의 중개가 필요하다. 육체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감각 세포뿐만 아니라 일반 세포와 몸 속에 있는 세포 아닌 다른 물질들도 다 영물체다.

영과 육은 존재적 상이성으로 말미암아 이 둘이 합하여 살아있는 생명체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하나님의 개입과 유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죽음은 주로 타인의 관점에서 본 결과이다. 생명의 구조를 갖춘 영은 그 자체가 생명이다. 생명인 영은 육체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살아 있는 존재이다. 사실 영이 감각을 느끼는 것은 육체를 느끼는 게 아니라 육체가 정한 정보 내용을 느끼는 것이다. 영은 육체를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육체를 볼 수는 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의 영이 육체와 분리되면 다른 사람이 볼 때에 그 육체는 물체가 될 뿐이어서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된 영은 육체를 가졌을 때와 동일한 내용의 정보에 따라 느끼기만 한다면 육체 없이도 육체 있는 것처럼 생명을 유지한 채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영이 생명구조를 잃게 되면 영질로 된다. 그 경우 전에 자아의식을 갖추고 있던 영은 자아의식을 소멸 당하게 되어 어떤 한 개인의 인격도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영의 구조를 잃게 된 영질은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힘을 거두시면 무(無)로 된다. 물질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중지하시면 영원히 사라진다. 영질은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는 힘을 거두시면 영원히 사라진다. 영질이 하나님의 존재 안으로 흡수되는 일은 절대 없다.

공간의 물체(소립자를 포함한 모든 것들)는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물체의 속성대로 움직이는 하나님의 의지라고 밝힌 바 있다. 모양과 속성은 정보이고 공간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그 속성을 가진 존재로서 행동하니 공간의 물체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공간의 물체는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눈앞에 하나의 사과가 있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의 눈을 통해 들어오는 그 사과에 대한 정보는 당신의 영에 전달되어 당신의 영이 사과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눈앞에 사과가 없더라도 전과 동일한 정보의 내용대로 영이 감각 작용을 일으키면 눈앞에 사과가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바로 가상현실이다. 그런데 세상은 사물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영들만 존재하는 그런 가상현실이 아니라 만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세상이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물체로서 행동하는 하나님의 의지가 공간에 정말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돌덩이를 발로 차면 발가락에 통증이 온다. 영이 깃들어 있는 몸이 물체이기 때문에 사람이 사고를 당해 몸이 잘리면 그 몸에 붙어 있던 영도 잘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단순한 가상현실이 아니라는 말이다. 세상도 가상현실이고 우리 몸도 가상현실이라면 우리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어디서 물을 건가? 가상의 몸으로 행한 것이 죄가 아니라고 우길 자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의 신앙적 책임을 떠나 세상은 정말로 존재한다. 이를 감안할 때 두 종류의 말씀이 있음을 알게 된다. 물체로서의 말씀은 정보와 의지가 합쳐진 말씀이고, 우리의 영에게 주어진 말씀은 정보만 있는 말씀이다. 전자의 말씀에 의해 물체가 공간에 실제로 존재하며 후자의 말씀에 의해 우리의 영이 그 공간의 물체를 인식하게 된다.

죽음 이후의 부활에는 죽음 이전의 모습을 갖춘 몸을 부여받는다. 이것이 가능하다. 영은 같은 공간에 겹쳐질 수 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 계셔야 바로 그 자리에 인간의 영이 존재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으며, 이는 한 공간에 둘 이상의 영이 공존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영의 특성이 바로 그러한 같은 공간에서의 공존 가능성이다. 이는 우리에게 나타난 현실을 미루어 별다른 증명이 필요 없는 것이다.

한 공간에 스무 개의 구슬이 있다고 하자. 하나님께서 구슬을 둘로 나누어 각각 10개씩 무리를 이루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같은 무리에 속한 구슬들끼리는 물체로서 서로 반응하게 하시고 다른 무리에 속한 구슬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스무 개의 구슬들이 움직이게 하실 수 있으시다. 이는 하나님의 자유다. 이 경우 한 공간에 어느 한 구슬은 자기를 포함한 10개의 구슬만 존재한다고 느끼게 된다. 다른 무리에 속한 하나의 구슬도 자기를 포함해 10개의 구슬만 세상에 존재한다고 느낄 것이다. 한 물체가 다른 물체와 반응하는 것은 두 물체의 의지덩어리들을 하나님께서 서로에 대해 물체로서 존재한다고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앞에 있는 만물은 우리 몸과 그 만물이 서로에 대해 물체가 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그렇게 운영하시기 때문에 나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공간은 단 하나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공간에 여러 개의 세상을 만드실 수도 있다. 각각의 세상은 무한한 공간에 오직 자신들만 존재한다고 느낄 것이다. 여러 독립적인 세상들은 같은 한 공간에 겹쳐 있다. 성경에 보니 죽은 자가 천국에 간다고 했으니 적어도 현 세상과 천국은 한 공간에 있는 두 세상임이 확실하다. 지옥도 있다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꼴 보기 싫은 죄인들은 또 다른 세상에 집어 넣으셨을까?

한 인간이 죽으면 그의 몸은 그것에 깃들어 있던 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가 된다. 같은 세상에 있던 제3자가 그의 몸을 보면 죽은 시체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몸을 벗어버린 영은 완전한 생명체다. 몸 없이도 몸이 있던 때의 감각정보만 주어진다면 그 영은 육체를 가진 것처럼 느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들이 머무는 세상을 따로 만드셔서 이 세상에서 죽어 육체를 벗은 영들에게 이 세상에 있던 육체 그대로 다시 입혀 다른 세상에 두실 수 있으시다. 이 때 이 세상에 있던 육체는 이 세상에 시체가 되었다가 썩을 것이나 죽었던 자의 영이 새로 받게 되는 육체는 전과 같은 내용의 것을 다시 받은 것이다. 한 육체는 이전 세상에 있던 육체이고 새 육체는 다른 세상에서 새로 받은 육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서 살고 죽는 문제는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니다. 혹시 사고로 죽을지라도 육체가 찢겨서 동시에 찢겼던 영은 하나님에 의해 완전히 복구되고 새 세상에서 이전의 몸과 똑같은 몸을 다시 부여받게 된다. 이러한 일은 하나의 절대공간의 한 지점에서 하나님께서 다수의 의지력을 갖추실 수 있으셔서 다수의 의지 덩어리가 생기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더 나아가 같은 세상 안에 있는 두 물체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용만 하신다면 같은 공간에 겹쳐져 있을 수도 있다. 사람이 불 가운데 던져지더라도 머리카락 하나 그을리지 않을 수 있다. 사람이 벽을 그냥 막힘 없이 지나갈 수 있다. 불에 타는 화학반응이나 사물끼리의 반발 운동은 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자연법칙일 뿐이다. 잠시 그러한 법칙을 무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이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말씀이 중지되면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 이전에도 이 세상에서 죽어 다른 세상에 있는 자들에게 이 세상은 존재하고 있지만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다. 이미 사라져 없어진 것과 같다고 말해야 한다. 세상의 종말의 날짜를 계산하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 세상 종말 날짜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자신이 죽는 날짜이다. 자신이 죽은 후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 올 세상 종말이 자기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말씀(의지 + 정보)임을 인정한다면 성경말씀 못지 않게 거룩한 몸이 아니겠는가? 성경은 우리 몸이 하나님의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한다. 이래저래 우리 몸은 거룩하고 귀한 존재이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함이 마땅하다. 우리의 영은 어떠한가? 우리의 영이 우리의 몸보다 더 귀하면 귀했지 결코 더 가치가 낮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같은 공간에 계신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현존을 증거한다. 그래도 하나님의 존재가 멀리 느껴지면 자기 몸을 만져보시라. 눈앞의 사물들을 만져보시라. 그것들은 공간에 현존해 계시는 하나님의 의지 덩어리들이다. 죽은 다음의 세계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마시라. 천국은 나 자신의 존재의 확실성만큼 확실하게 존재한다. 천국은 이 세상의 존재의 확실성과 동등한 확실성으로 존재한다.

 

 

 

 

3. 삼위일체 하나님

 

 

이 세상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입자들의 개수만큼의 의식이 존재해야 한다. 한 입자에 하나의 하나님의 의지가 필요하다고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을 지으시고 계속 유지하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수의 의식을 갖추고 계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십 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자들과 동시에 인격적 대화를 나누실 수 있으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는 적어도 무한한 수의 인간의 인격 정도의 인격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 인간에게 열 개의 손가락이 있는 것과 같이 한 하나님께 그런 무한한 수의 인격을 동시에 보이실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본질적으로 다르시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참모습에 대해 이상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성경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Person)들을 가지신 한 하나님이시라 말하고 있다. 내가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의 단순한 다인격적 능력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탁월한 존재 능력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 것 같다. 비유로 표현하자면 한 인간이 한 몸에 한 머리와 세 입을 가지고 세 인격적 능력이 있어서 동시에 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또 다른 경우로 한 사람이 한 몸에 세 머리가 붙어있어 세 사람과 동시에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고 하자.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동시에 세 장소에 존재하며 세 사람과 일대일로 대화한다고 하자. 내가 볼 때 창조주 삼위일체 하나님과 가장 유사한 비유는 마지막의 것이다. 자신 안에 완전한 본질을 실현한 존재를 실체라고 하자. 물론 실체의 의미가 다양하겠지만 그와 같이 정의한 실체에 의하면 마지막의 경우 한 사람이 동시에 세 인간실체들을 소유하고 있다. 앞의 두 경우는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이므로 인간실체들이 아니다! 한 머리에 세 인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자라면 보통(?)인간이 아니고, 한 몸통에 세 머리들을 붙이고 있는 자도 보통 인간이 아니다. 그래서 이 두 경우는 인간실체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마지막의 경우도 그게 무슨 인간이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세 실체들 각각을 대하는 세 사람들은 보통 인간을 대하고 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동시에 세 군데에 자신의 완전한 존재를 두고 계신다. 세 존재들께서는 각자 완전한 하나님의 본성을 갖고 계신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즉 완전한 신적 실체들이시다. 각각의 자리에서 세 존재들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의 능력과 성품을 보이신다. 이 세 존재들을 위격들이라 칭한다. 하나님의 본성을 온전히 갖고 계신 세 위격들의 실제 존재들을 세 위격적 실체들이라 한다. (보통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유일하신 한 하나님께는 substance(실체)를, 그 유일하신 하나님 안의, 즉 삼위일체 하나님 안의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각각의 위격들께는 hypostasis(위격적 실체, Personal substance)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하지만 각 위격들께서 완전한 신성을 가지신 분들이시므로 신적 실체(divine substance)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당신이 서울과 워싱턴과 평양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하자. 당신의 본래 위치는 서울이다. 평양과 워싱턴에 당신의 존재를 둘 필요가 있어서 그 두 곳에 당신 자신을 존재케 한 것이다. 물론 평양과 워싱턴에 있는 당신은 완전한 당신이다. 그러면 당신은 그 두 곳에서도 사람으로서 감각을 느끼며 대화도 하게 된다. 당신의 존재의 본거지인 서울에 남아 있으면서 평양과 워싱턴까지 가서 그 곳에서 동시에 느끼며 생활하는 것이다. 서울, 평양, 워싱턴에 있는 각각의 자아들은 그 곳에서 스스로 ‘느끼며’ 말하며 생활하면서도, 다른 두 곳에 있는 자신의 두 자아들의 느낌과 생각을 ‘동시적’으로 ‘안다’. 각 자아들이 느끼는 것은 자신의 몸과 정신에 발생하는 것뿐이지만 다른 두 자아들의 생각과 느낌은 동시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두 자아들이 바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서울에 있는 당신은 동시에 평양과 워싱턴에 있는 당신을 보며 말 할 수도 있다. 평양에 있는 당신은 서울과 워싱턴에 있는 당신을 보며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의 관건은 당신이 당신의 존재에 머물면서 동시에 당신의 존재로부터 나와 다른 곳에 있게 되는 능력이다. 즉 탁월한 존재 능력이 관건이다. 또 다른 경우를 보자.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씌어졌다. 이 성경이 한글과 영어로 번역되어 있다. 동일한 한 성경이 한글판 성경과 영어판 성경으로 변환되어 두 언어권 사람들에게 현존해 있다. 그 두 번역된 성경들은 동일한 내용과 동일한 권능으로 다른 두 언어권 사람들에게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본래의 성경이 자신으로부터 나와 한글판 성경과 영어판 성경으로 동시에 존재하며 각각 완전한 성경으로서 사람들에게 읽혀진다.

삼위일체 하나님도 이와 마찬가지이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당신 자신에게 머무시면서 동시에 당신에게서 나오셔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으로 계신다. 즉 한 분의 신적 자아가 동시에 세 신적 실체(위격적 실체)들로서 계시는 것이다. 이 세 신적 실체들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신 분들이시다. 이 각각의 신적 실체들을 위격(位格, Person)들이시라 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독생(獨生, beget)의 과정을 통해 당신 자신을 한 번 더 존재케 하셨다. 이렇게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의 과정을 통해 존재하시는 분이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이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품에 독생해 계신다고 증거하고 있다(요1:18). 이 성자 하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영원 전부터 함께 계셨다. 비록 독생의 과정을 통해 성자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긴 해도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 자신의 거듭된 존재이시기 때문에 결단코 인간적 의미의 부자 관계로 성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계신 게 아니다. 성자의 실체 자리에 계시기 때문에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현재의 공간에 성령이라는 신적 실체로서 현존해 계실 수 있으시다. 이 경우는 독생의 과정이 아니라 공간으로의 파송(派送, send)이다. 성자 하나님께서도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성령으로서 현공간에 현존해 계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의 공간적 현존이시다. 성부와 성자는 자신들께 머무시면서 동시에 공간에다 자신들의 존재를 두실 수 있으시다. 따라서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고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다. 이 모든 신적 실체들께서는 한 하나님께서 동시에 세 곳에다 완전한 자신을 두실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존재 형식이다.

그런데 성부와 성자 두 분 다 독자적으로 공간에 성령을 파송하시면 두 성령들께서 공간에 계신다는 말인가?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그런 식의 사위일체(四位一體)를 말하고 있지 않다. 성령께서 분명 성부 하나님의 영이시고,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면서도 한 위격적 실체이시는 방법은? 이렇게 설명해보자. 모든 신성의 제 일(一)의 근원이신 성부 하나님께서 독생의 과정을 거쳐 자신을 한 번 더 있게 하셔서 성자 하나님이 있으시게 되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파송을 성자 하나님께 위임하셨다. 그리하여 완전한 신성을 지니신 성자께서 자신의 존재를 공간에 파송하시어 공간에 성령이 계시게 하셨다. 이 성령은 직접적으로는 성자 하나님의 영이시고 성자의 제2의 자아이시다. 그런데 성자께서는 성부의 제2의 자아이시므로 성령은 성부의 제 3의 자아이시어, 결과적으로 또 엄밀한 존재적 측면에서도 성령은 성부의 영도 되시는 것이다. 만약 성자께서 성령을 파송 안 하시고 성부께서 파송하셨다면, 이 세상의 창조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신 성령께서 성자와 존재적으로 직접적 연관성이 없어지므로, 이것은 성자를 두고 성경이 증언하는 바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요1:10)”,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라는 말씀과 일치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성부의 제 2의 자아이신 성자께서 성령을 공간에 파송하셨다면, 성령은 성자의 영이 되시어 저 말씀들과 일치하게 된다. 더욱이 성자께서 성부 하나님의 창조의지를 받들어 성자의 영인 성령을 통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모든 게 잘 정리된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성부의 제 3의 자아로서 (성자의 단계를 거치기는 하셨지만 결과적으로) 성부로부터 나오셨다는 말도 성립하고, 성령께서 성자의 제 2의 자아로서 성자로부터도 나오셨다는 말도 성립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공간에 존재하신다고 해야 하고, 성부와 성자께서는 공간이 아닌 ‘하나님의 존재차원’에 계신다고 해야 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성부) 품속에(하나님의 존재 차원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성자)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부 하나님의 품에 성자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했는데, 이러한 상태가 다 자란 아이를 잉태하고 있는 임신한 여자와 어떤 차이가 있나? 천지 차이다!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절대로 그 잉태된 아이 안에서 자신의 제 2의 자아의식을 갖고 생각하거나 느낄 수 없다. 비록 몸은 탯줄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이 경우 임신한 여자와 복중의 아이는 각자 전혀 공유할 수 없는 자아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한 하나님께서 두 위격에 동시에 계시는 관계이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 위격들께서 완전한 신적 실체들이시므로 서로간에 나와 너로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두 눈만 갖고 있는 생명체라고 하자. 각각의 눈은 나름대로 독립적으로 세상을 관찰할 수도 있고 한쪽 눈이 다른 쪽 눈을 볼 수도 있다. 눈을 위격이라 했을 때 각 위격께서는 각자의 고유한 영역 안에서 자신만의 신적 생활을 하시고 또 서로에 대해 나와 너의 관계로 대하실 수도 있으시다. 그러면서도 이 모든 일은 한 하나님의 삶이다.

여기서 문제될 수 있는 것이 “그러면 현재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원래(?)’대로 성령과 성자를 소멸시키시어 홀로 계실 수 있으신가?”이다. 과연 성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성자와 성령께서 소멸되실 수 있으신 존재인가? 대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다고 증언하시고, 성경은 예수께서 영원하신 분으로 증언한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변치 않는 분이시라고 증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원래부터’ 삼위일체로 계셨다는 말이다. 그리고 성경과 기독교 전통은 성자의 완전한 신성을 말하고 있다. 완전한 신성은 ‘자존적’ 존재자라는 말을 포함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과 현재에 존재케 하시는 능력을 부여받아 존재하게 된다. 그리하여 피조물은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다. 피조물이 자신의 존재능력을 자신이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는 성부로부터의 독생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성부의 자존성까지도 부여받으셨기에, 또 성령께서는 성자로부터 파송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공간 안에서의 자존성을 부여받으셨기에, 이 두 위격들께서는 피조물처럼 자신들의 존재를 다른 존재로부터 계속 지원받지 않고도 성부 하나님처럼 자존해 계신다. 즉 성자는 성부께 자신의 현존재를 지원받지 않으시고,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자신의 현존재를 지원받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즉 성자와 성령께서 피조물처럼 성부 하나님께 존재적으로 종속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 성자와 성령께서는 성부와 동등한 존재력으로 자존해 계시며, 성부의 제2 자아, 성부의 제 3의 자아이시어 모든 면에서 성부와 동등하다. 다만 성자는 성부의 독생자로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으로서 주어진 사역을 감당하신다는 게 차이점이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동등한 신성을 지니신 채 한 하나님으로 계신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삼위일체로 계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 삼위일체 안에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의 단 하나의 의지만 있으므로 그 어떤 경우에도 ‘수동’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고, 종속론이 발붙일 틈이 없다. (설사 성부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다가 어느 날 독생의 과정을 거쳐 제 2의 자아인 성자를 존재케 하실지라도 성자는 성부께 종속적이지 않다. 왜냐 이 둘은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한 하나님께서 동시에 세 위격적 실체들을 가지실 수 있다는 주장에 반기를 드는 자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좀 더 확실한 비유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해본다. 요즘 인터넷 시대에 블로그라는 것이 있다. 원(原)블로그는 포털사이트의 기억장치에 있다. 그런데 인터넷 접속자가 그 포털사이트의 블로그에 접속하면 원블로그의 모든 내용이 접속자 컴퓨터로 전송되어 동시에 두 곳에 한 블로그가 존재하게 된다. 즉 원래의 한 블로그가 동시에 여러 곳에 자신과 동일한 존재 내용과 영향력을 지닌 자기 자신들을 둔다. 이게 삼위일체 하나님 모델이다.

여러분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시라. 없었던 당신의 존재가 있게 된 것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공간 안에 당신의 영을 존재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는 말이다. 존재케 하는 능력이 하나님 안에 있다. 여러분 자신들의 존재를 생각하면 공간 안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고려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존재케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알 수 있다. 유일하신 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신적 본질을 갖추신 세 신적 실체들을 동시에 소유하신 분이시다. 각 신적 실체들께서는 완전한 신성을 소유하셨다. 그러므로 각각의 신적 실체들께서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시며 자신과 구별된 존재를 인식하신다. 그리하여 성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아의식(自我意識, Self-consciousness)을 갖고 계시며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자신과 구별된 존재로 인식하신다. 그러는 동시에 세 신적 실체들께서는 한 하나님의 세 자아(自我)들이시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자아의식과 모든 신적 감정이 성자 하나님의 자아의식과 신적 감정에 현존한다. 이처럼 유일하신 하나님께서는 각 신적 실체 안에서 주도적으로 자신의 위격의식을 갖고 계시면서도 동시에 각 위격께서는 다른 두 위격들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아신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요17:21).” 성부의 입장에서 보면 성자와 성령이 바로 자신이고, 성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부와 성령이 자기 자신이고, 성령의 입장에서 보면 성부와 성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각 위격적 실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현상은 각 위격적 실체께서 직접적으로 체험하시지만, 다른 위격적 실체들에서 발생하는 모든 정신현상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는 것은 아니지만 동시적으로 그 내용을 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각 위격적 실체들 안에는 각각의 자아의식들이 있다. 요17:21 말씀은 성부의 위격적 실체가 성자의 위격적 실체 안에 계신다고 하기보다는, 성자의 위격적 실체 안에 있는 성자의 자아의식 안에 성부의 자아의식이 현존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이는 성부의 위격적 실체 안의 모든 정신현상이 바로 성자 자신의 정신현상이라는 성자의 의식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삼위일체의 각 위격들께서는 다른 두 위격들의 모든 정신현상을 자신의 정신현상으로 이해하고 계신다. 왜냐, 세 위격들께서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고, 다른 두 위격들의 모든 정신현상을 즉각적으로 자신이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위격께서는 다른 두 위격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신다. 따라서 성부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면 성자께서 그 결정을 자신의 결정으로 아시기에 성부의 자아의식이 성자의 자아의식 안에 있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성령이 성부의 영이시고 성자의 영이시기에 성부와 성자의 뜻은 즉시 성령이 아시고, 그 뜻을 자신의 뜻으로 인식하시기에 성령의 자아의식 안에 성부와 성자의 자아의식이 현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의 모든 정신현상이 즉각적으로 성부께 알려지고, 성부께서는 그 정신현상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시기에 성부의 자아의식 안에 성자와 성령의 자아의식이 현존하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이 양태론 이단이 아닌 이유는 양태론 이단이 단 하나의 신적 실체가 번갈아 가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할을 하신다고 주장하지만 위의 삼위일체론은 세 신적 실체(위격적 실체)들을 동시에 다 인정하기 때문이다. 양태론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께서 사실은 성부이셨다는 오류를 낳게 되나, 위의 삼위일체론은 세 위격적 실체들 중 하나인 성자 하나님께서만 고통을 당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위의 삼위일체론이 삼신론이 아닌 이유는 삼신이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이미 밝힌 바 있고, 위의 삼위일체론은 한 완전한 신적 실체께서 다른 두 위격들로 자신의 존재를 확장시켰다고 말하므로 삼신론이 아니라 삼위일체론이 되는 것이다. 삼신론이 가능하여 삼신들이 존재한다면 각자는 생각과 감정과 느낌이 완전히 독립적인 신들이 된다. 그러나 위의 삼위일체론의 세 위격적 실체들께서는 생각과 감정과 느낌과 고통과 영광을 완전히 공유하고 있으시다. 세 위격적 실체들께서는 서로 구분은 될지언정 분리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세 위격적 실체들은 한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존재 능력에 의해 나타난 한 하나님의 존재현상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절대 분리 불가능한 한 하나님의 세 위격적 실체들이시다.

세상 창조와 관련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려해보자. 세상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창조하셔서 그들로부터 신(神)으로서 경배를 받으시고 그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셔서 영원히 함께 사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공간 안에 세상을 창조하시기 위해 성령이라는 위격으로 자신의 존재를 두셨으며, 인간들의 구세주이시고 친히 인간들의 왕이 되시기 위해 성자라는 위격으로 자신의 존재를 두셨다. 또한 영적 아버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인간들을 사랑하며 인간들로부터 사랑 받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성자라는 위격을 자신의 존재로 두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셨던 것이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께서 삼위로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질이 삼위일체이시다’라는 말도 성립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독자적 위격적 실체들께서 한 하나님의 한 실체를 이루신다. 각 위격의 실체 안에는 각각의 신적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 있다. 이 세 신적 자아의식들은 상호 자아의식의 교류 가운데 있다. 삼위일체(三位一體)는 셋-위격들-한-실체(three-persons-one-substance)로 표현된다. 한글의 삼위일체는 세 위격적 실체들께서 한 실체를 이루시고 계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한 위격께서 다른 두 위격들을 자기 자신으로 여기시기에, 세 위격적 실체들을 세 신적 자아의식들이 사실상 공유하신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세 신적 자아의식들뿐만 아니라 세 위격적 실체들까지도 구분함과 동시에 분리 불가능하게 통합시켜 놓지 않으면 성자의 성육신을 적절히 설명하기 힘들다. 한글로 된 삼위일체라는 말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삼위가 일체라는 말은 삼위가 하나가 되었다는 동적(動的)인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삼위는 단순히 세 신적 자아의식들을 지칭하기보다는 세 위격적 실체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 사용되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하나님의 본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의 역동성을 잘 표현해 주는 말이 삼위일체이다. (다른 나라의 표현은 삼일성(三一性)이 고작이다.)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힘이 있음을 고려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속성이고, 삼위일체라는 존재형식도 넓게 봐서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게 된다. 존재하는 힘이라 함은 자신 스스로를 존재케 하는 힘이다. 이 존재케 하는 힘은 자신의 존재 안에 있는 힘이고, 그러므로 무(無)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형성시키는 힘이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이런 존재의 힘은 본래부터 갖춰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재케 하는 힘이 없다면 어떻게 스스로 존재하시겠는가? 현재의 공간은 순간적으로 존재했다가 영원히 사라지고 그 순간 또 다른 공간이 존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항상 현재에 존재하신다. 이는 하나님 안에 스스로를 존재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과 동일한 자아를 거듭 존재케 하실 수 있으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자존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필연적으로 삼위일체로 존재하실 힘이 있으시다. 1만 가능하다면 1에서 2가 되고 또 3이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제2의 자아를 두실 수 있으시고 제3의 자아도 두실 수 있으시다. 사람은 자기 맘에 맞는 옷을 입는다. 스스로에 대해 존재의 힘을 갖고 계신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맘에 드시는 존재형식을 취하신다.

빈 공간에 세상을 창조하시고 무리 없이 다스리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삼위일체로 존재하신다. 그러한 존재형식이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존재형식을 취하시는 것이다. 공간 안에서의 창조는 성령께서 직접 하시는 사역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갖추고 계신 존재케 하는 힘을 사용하시어 영질을 생성시키시고 그것으로 인간의 영을 만드셨다. 하나님의 존재케 하는 힘은 ‘스스로를 거듭 존재케 하는 힘’과 ‘자신과 다른 존재를 생성하는 힘’으로 구분된다.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존재로부터의 유출일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자에게 한 마디만 하겠다. “그게 아니오! 하나님께서는 존재케 하는 힘으로 무(無)의 상태(텅 빈 공간)에서 영질을 생성시키셔서 유(有)가 되게 하셨소.”

창조가 한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삼위께서 공동으로 일을 하신다. 그럼에도 각 삼위들께서는 역할이 있으시다. 모든 창조 사역은 성부 하나님의 계획(뜻)에 따라 이뤄진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육신하셔서 인간이 되어야 하셨기 때문에 이에 맞게 성부 하나님의 친아들로 자신의 역할을 정하셨다. 성부와 성자께서는 성령이라는 위격을 통해 세상에 현존하실 수 있으시다. 성령께서는 성부의 영이시고 성자의 영이시다. 성자께서 성육신 하시기 전이나 부활 승천 이후에도 이 세상에서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의 현존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성령이라는 위격이 반드시 필요하다.

 

 

 

 

4. 인간이 되신 하나님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들 중에 인간이 되신 분은 바로 성자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의 자아의식(Self-consciousness)이 성육신의 주체이시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인성(육체, 영, 정신)을 지닌 역사상의 예수를 자신의 위격적 실체에 결합시키셨다. 신의 성품을 지닌 신적 자아의식을 신격(神格, God-personalty)이라 하고 인간의 성품을 지닌 인간적 자아의식을 인격(人格, man-personality)이라 하자. 물론 하나님께서 인격적(personal)인 분이시라 할 수 있는데, 이 때의 인격은 하나님께서 신적 지정의(知情意)를 가지셨다는 말이다. 이 때의 인격은 지정의를 가진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격과 인간의 인격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신격과 인격으로 구분하자는 말이다.

전술했다시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위격적 실체들은 서로 구분이 되면서도 분리가 불가능하다. 완전한 인간 예수가 잉태되는 순간에 성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자신의 위격적 실체와 결합시키셨다. 그래서 성육신이 성부나 성령이 아닌 성자께 일어난 일이다. 성자께서 완전한 인성을 자신의 존재로 삼으신 것이다. 이는 마치 한 나무의 껍질을 칼로 그어 다른 나무의 눈을 붙여 놓으면 그 본래 나무와 접붙여진 눈이 한 생명이 되어 접붙여진 나무가 자라 열매를 맺게 되는 것과 같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위격적 실체와 완전한 인간 실체가 결합되어 단 하나의 신인실체(神人實體, God-man-substance)로 되셨고, 완전한 인격과 완전한 신격이 결합된 단 하나의 신인격(神人格, God-man-personality)을 갖고 계신다. 단,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의식은 영원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성자 하나님의 자아의식이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이 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성자의 자아의식과 인간의 자아의식이 병립하여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성자 하나님의 자아의식만 있을 뿐이고 이 자아의식께서 신성을 통해 신격(God-personality)을 보이시고 인성을 통해 인격(man-personality)을 보이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적 의지(will)와 인간적 의지 두 가지가 병존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인성(영 + 육체)을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적 의지가 없다면 어떻게 입으로 말씀을 하시고, 어떻게 땅위를 걸어다니시나? 말씀하시고 걸으시는 데에는 인간적 의지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실 때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취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간적 의지가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神人)결합이 샴 쌍둥이(Siamese twins)처럼 신과 인간이 각자 독립적 의식을 유지하며 결합된 채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샴 쌍둥이도 두 개의 의지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각자 독립된 의지들이다. 그 이유는 샴 쌍둥이 각자에게 각각의 자아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하나의 자아의식이 있다. 이 자아의식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장악하여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를 동시에 일으키신다. 따라서 양손을 가진 한 사람이 양손을 사용하여 자신의 일을 하듯 양성(兩性,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신적 의지와 인간적 의지를 다 사용하시어 당신의 일을 하신다. 두 의지들 간에는 절대로 갈등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두 의지들이 바로 한 신인(神人)의 자아의식의 의지들이기 때문이다. 신적 의지는 신성에서 나오고 인간적 의지는 인성에서 나온다. 의지도 존재적으로 구분은 되나 분리(상호 갈등이나 모순)가 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과 인성은 구분은 되나 분리되지 않은 채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신성이 변하여 인성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성이 변하여 신성이 되는 것도 아니며, 양성이 경계를 허물고 섞여 제 3의 새로운 실체를 형성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 몸을 살펴보시라. 수많은 세포들은 세포막이 있어야 하고, 장기들은 서로 구분이 되어야 몸이 제대로 작동한다. 우리의 몸을 보더라도 한 생명 안에 세포나 기관들이 서로 구분은 되나 분리되지 않아야 정상적인 기능을 한다. 우리는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해서도 안되고,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다른 존재들이라 각자 따로따로 작동한다고 해서도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은 성자 하나님의 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에 보이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완전한 신성이 거하여 계신다.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을 때 그분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통해 그 고통을 다 느끼셨다. 혹자는 그 당시에 신성은 아무런 고통을 당하지 않으셨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게 뭔 해괴한 소리인가! 분명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을 통해 고통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 고통을 당한 주체는 바로 성자 하나님의 자아의식이시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인성을 통해 친히 고통을 당하신 것이다. 당신의 왼손이 불에 데었다고 하자. 그러면 당신의 오른손은 불에 안 데었기 때문에 당신의 왼손의 고통은 당신의 오른손에 아무런 의미가 없나?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양손을 가진 당신이 왼손을 데었기 때문에 당신은 고통을 당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성을 지니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성을 통해 극심한 고통을 당하셨다.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원래 손이 없던 자가 타인의 손을 이식받았다고 하자. 그런데 이 자의 이식받은 손이 칼에 베었다. 그러면 이 자는 이식받은 손의 상처가 주는 고통을 받게 된다. 성육신하신 성자께서는 원래 없으셨던 인성을 자신의 존재로 취하시어 그 인성을 통해 사람들을 대하시기도 하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도 당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의 신성과 인성을 너무 구분하여 네스토리우스주의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성자께서 완전한 인성을 지닌 나사렛 예수를 자신의 존재로 삼으셨다는 말의 뜻이 뭘까? 우리의 뇌와 몸의 지체를 생각해보자. 뇌가 입에게 명령하면 입이 움직여 말을 한다. 우리가 몸의 어떤 부분을 자주 사용하면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뇌에도 변화가 생겨 그 부분을 관장하는 뇌의 부분이 상대적으로 다른 곳보다 더 발달된 구조를 갖춘다. 그리고 눈이 받는 영상신호는 일단 뇌에 전달되어 그 뇌가 영상신호를 영상으로 인식한다. 이처럼 뇌와 몸의 지체는 상호 유기적 관계에 있다. 이를 성자의 성육신에 적용해보자. 적어도 성자께서 성육신하셨다면, 첫째로, 성자의 자아의식이 인성을 통해 하시고자 하는 행동이 인성에게 전달되어 인성이 그대로 움직이고, 둘째로, 인성의 모든 감각 내용이 성자의 자아의식에게 전달되어 성자께서 그 감각을 느끼시고, 셋째로, 성자의 위격적 실체 안에 인성을 담당하는 부분이 있어 인성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는데 필요한 어떤 구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자의 첫 인성이 성모 마리아에게 잉태된 순간부터 성자의 위격적 실체는 그 인성과 연결되어 신성과 인성이 상호 유기적 작용을 했다. 성자의 신격은 인성이 자라남에 따라 인간의 인격도 갖추게 되신다. 남자가 결혼하면 남편의 인격만 갖추고 있다가 아들이 태어나면 점차 아버지의 인격도 덤으로 갖춘다. 아버지의 인격은 남편의 인격이 확장되어진 부분이다. 아들이 태어났다고 해서 남편의 인격과 아버지의 인격이 갈라져 두 인격들이 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육신 이전의 성자께서는 오직 신격(神格)만 갖추고 계셨다가 성육신 이후로는 점차 그분의 인성이 성인이 되시면서 성인의 인격(人格)도 덤으로 가지시는 것이다. 성자께서는 아이의 인격을 거쳐, 청소년의 인격을 거쳐, 성인의 인격을 가지셨다. 성자의 인성이 완전한 인성이라고 해서 성자의 신격과 인격이 분리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문제는 과연 성자의 위격적 실체와 그분의 인성이 어떻게 결합되어 상호 작용을 하냐는 것이다. 성자의 위격적 실체는 ‘하나님의 존재 차원’에 있고 그분의 인성은 공간 안에 있기에, 확실치는 않으나 내 생각엔 공간에 계신 성령께서 이 둘을 연결해주시는 것 같다. 성자의 인성이 ‘성령’으로 마리아에게 잉태되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성자의 신성과 인성 사이에 성령께서 개입해 계신다는 단서가 혹시 아닐까? 우리의 눈과 뇌 사이에 ‘신경’이 있어서 뇌의 명령은 신경을 통해 눈에 전달되어 시선의 뱡향이 바뀌기도 하고, 눈의 감각정보가 신경을 통해 뇌에 전달되어 뇌가 인식하듯, 성자의 위격적 실체와 인성 사이에 성령께서 계셔서 둘 사이를 연결해 주시는 것 같다. 물론 성령을 거치지 않고 성자의 신성과 인성이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성자의 인성과 연결되는 구조를 성자의 위격적 실체만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자의 위격적 실체의 의지만이 성자의 인성에 전달되어 그 인성이 움직이고, 그 인성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오직 성자의 위격적 실체에게만 전달되어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성자께서는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된 인간 예수를 자신의 존재로 삼으셨다. 그리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아의식은 성자 하나님의 위격적 실체와 인간 예수의 인간실체를 동시에 소유하고 계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볼 때 우리는 성자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위격적 실체에서 그곳에 현존해 계신 성부 하나님의 자아의식을 만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현존해 계신 성부 하나님의 말씀을 성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성을 통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로 말씀하신다.

성자 하나님의 지상생활을 살펴보자. 성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철저하게 인간으로 사셨다. 그 이유는 그분께서 인간의 삶의 모범을 보이셔야 했기 때문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셔서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순종하시고 지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위계질서에 복종하는 삶을 사셔야 할 이유가 있다. 이는 인간의 최후 심판 때문에 그러하다. 최후 심판 때 심판석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 “예수님께서는 신적 능력으로 세상에서 사신 분이시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으로 살다가 죄를 지은 우리들을 심판하실 자격이 없으십니다”라는 주장에 대해 “아니다. 난 너희들보다 더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순전히 인간적 능력으로 살았다. 난 죽을 고생을 했으나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러니 난 너희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시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삶을 살아보지 않으시고 어떻게 인간들을 심판하실 수 있으시단 말인가! 내가 볼 때 이 땅에서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적 능력을 잠시 사용 안 하시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시며 하나님의 선지자로 사신 것 같다. 예루살렘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호통치시며 내쫓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성부 하나님께 피할 수 있도록 기도 드린 것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아의식은 성자 하나님의 자아의식이었으나 철저히 인성만을 나타내 보이셨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실 때에 성령의 능력으로 치료하신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마12:28). 즉 예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사신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마음을 철저히 비우면 가능하다. 당신이 어느 한 나라의 왕이라고 하자. 당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이다. 그러나 당신은 잠시 변장하고 거지들 사이에 끼어서 철저히 거지들 세계의 규율에 따라 거지의 삶을 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철저히 인간의 한계와 규율 내에서 인간으로서 사셨다. 돌덩이를 떡으로 만들어 먹는 것은 반칙이었고, 높은 데서 떨어져 천사들로 하여금 손으로 받게 하는 것도 반칙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그분의 뜻을 구하여 그대로 순종했고, 능력을 행하실 때에도 옛날에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했듯이 그렇게 하셨다. 마귀가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넘어뜨리려 할 때에도 예수께서는 즉시 마귀를 물러가라 명하지 않으시고 성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 성부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기다리셨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을 철저히 보류하시고 온전히 인간으로 사셨다.

간혹 하나님의 종들 가운데 투시의 은사를 받아 정확하게 병든 곳을 알아내고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능력을 받은 분들이 있다. 귀신을 명하여 내쫓는 하나님의 종도 있다. 병을 고치는 분도 있다. 모세는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다. 이러한 것을 볼 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은 선지자들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물론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하는 능력은 예사롭지 않지만 구약성경의 여러 기적 이야기도 이에 못지 않게 놀라운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 하나님이셨으나 철저히 인간 선지자로 사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율법을 폐하려 하심이 아니라 일점 일획도 남김없이 다 이룩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땅에 태어나서 율법을 지켜 죄가 없는 자가 하나도 없다면 율법은 인간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다.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신성을 접어 두신 채 온전히 인간으로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 그리하여 비로소 율법은 인간들이 지킬 수 있는 법, 인간들이 지켜야 하는 법이 되었다. 율법이 효력을 발생할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이제 그 누구도 율법이 어렵다고 핑계 대며 하나님의 심판을 거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안에서 율법은 완성되었다. 또한 율법을 몸소 다 지키신 예수께서 최후 심판의 심판권을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으셨다. 예수께서 온전히 율법을 지키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겠는가? 성자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온전히 율법을 지키심으로 전능한 분이실 뿐만 아니라 의로우신 분도 되셨다. 법을 지킨 자가 의로운 자이다. 성육신의 삶을 통하여 성자 하나님께서는 의로움을 덧입으셨다. 이 의로움으로 예수께서는 최후 심판석에 앉으실 자격을 얻으시고, 이 의로움으로 타인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실 수 있는 자격도 얻으셨다.

 

 

 

5. 창조주 하나님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존재의 능력으로 성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신다. 그분께서 지으신 세상을 볼 때 그분께서는 무한한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정말로 다행스런 일은 이 무한한 능력을 갖추신 분께서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 채 피조물들을 영원히 괴롭히는 신이 아니라 사랑과 인자하심이 넘치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또한 정말로 다행스런 일은 이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안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영생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맘이 변하셔서 피조물들을 다 쓸어버리지 않으신다는 말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나! 영원이라는 세월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 덕분에 영원한 시간을 의미 있게 살 수 있게 되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당한 우리들의 고난을 영원한 세계의 면류관이 되게 하신다. 영원한 세계에서 금면류관보다 더 귀한 것은 바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받았던 우리의 고난이다. 고난의 기억은 감쪽같이 사랑의 마음으로 바뀌어 있게 된다. 많이 고난을 당한 자가 더 많은 사랑의 마음을 품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편하게만 살려고 애를 쓰는지! 이 땅에 존재하는 고난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작품이다. 악인을 계속 살려두시고 마귀를 계속 풀어놓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악인과 마귀는 우리의 밥이다. 그들로 인하여 우리의 믿음이 커지고 우리의 사랑도 커지고 우리가 받을 상도 커진다. 참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당신의 뜻에 따라 구원받아 영생을 얻을 자들을 정하셨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유는 나중에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 자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아니셨다가 아버지가 된 경우보다 처음부터 아버지이신 경우가 천국에 살게 된 자들에게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갖게 한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미리 정하셨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 훈련받고 인격을 쌓아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심은 당신의 자녀들을 태어나게 하셔서 양육할 장소가 필요하셨기 때문이다. 그게 주목적이다. 세상이 아름답고 장대한 것을 보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차 천국에서 만날 아버지의 거룩함과 전지전능하심을 배우게 된다. 마귀나 악인들은 조연들일 뿐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을 훈련시키는 도구이고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낼 수단일 뿐이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우리가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이 세상을 떠나면 반드시 천국에서 영원히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을 다시금 확신시켜 주기 위함이다. 성경에 나온 내용들이 과거 사람들의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기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래 내용은 불변하는 진리임을 알려주려 이 글을 쓴 것이다. 현대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은 물질의 운동을 표현한 것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성경의 진리는 이 땅에서 그저 인간답게 살라고 우리에게 주는 윤리나 자아성찰 혹은 자아결단의 촉구가 아니다. 성경의 진리는 하나님과 인간이 영원히 행복하게 부자지간으로 살아가는 길을 밝히는 등불이다. 우리는 현대과학의 발전에 개의치 말고, 천국이 이 세상의 현실과 동등한 자격으로 지금 존재한다는 확실한 믿음 가운데, 복음적으로, 장래의 영생에 대한 확신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초대교회의 그 뜨겁고도 확신에 찬 생생한 믿음으로 되돌아가자는 말이다. 과학을 초월한 현대적 신앙 언어로 복음을 더 명료하게 표현하자는 말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더 실감나게 느끼며 섬기자는 말이다. 천국이 다가올수록, 세상 종말이 다가올수록 하나님이 더 가깝게 느껴져야 정상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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