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들

야곱과 에서 & 하나님의 선택 ㅡ 말1:2-4, 롬9:10-14

stevision 2025. 2. 11. 11:11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 (말1:2-4) <<

>>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롬9:10-14) <<

유튜브에 보면 가장 사악한 부모 새(bird)로 황새가 등장한다. 알을 네 개 정도 낳아놓고 새끼들이 부화하여 며칠 지나니, 부모 황새가 제일 작은 녀석을 죽이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어떤 황새는 네 마리 새끼 중 제일 작은 녀석과 제법 큰 녀석 둘을 둥지 밖으로 던져버렸다. 어떤 황새는 어떤 한 녀석을 지목하여 머리를 계속 쪼아 죽였다.

그러나 부모 황새 입장에서는 먹이가 넉넉지 않아 어차피 한 두 마리 밖에 성체로 못 기를 거니, 네 마리 다 기르려 하다 영양실조로 다 죽게 되는 것보다, 일찌감치 두 녀석을 제거해 나머지를 성체로 길러야 하는 건 아닐까? 작은 자식을 죽여 삼킨 것도, 결국은 그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다른 먹이로 더 많이 나머지 새끼들에게 먹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걸 인간적으로 판단하여 불의하다 할 수 있겠는가? 저런 행위를 사악하다 하는 인간은 어떠한가? 기근에 제 자식들 일부를 죽이거나 심지어 잡아먹은 자들이 있었고, 양식 아끼려 노동력이 없는 늙은 부모를 죽게한 자들도 있지 않았는가?

그리고 선택받지 못한 새끼들이야 부모새가 원망스럽겠지만, 선택받은 새끼들은 다른 형제들을 죽이고 자기를 살게 한 부모새가 엄청 고맙지 않겠는가?

사람이 사는 이 땅은 크기가 한정적이고,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자원도 그러하다. 사람의 수가 무한정 늘어나면 양식이 모자라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울 수 밖에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질병, 전쟁, 사고 등을 통해 알맞게 그 수를 유지케 하신 적이 있으셨다. 이는 불가피한 것이지 불의한 일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때론 인간의 행위에 상관없이 이 땅에서 살아남을 자들과 물러날 자들을 정하신다. 버림받은 자들은 제거되고 선택받은 자들은 살아남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에서가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 야곱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셨다. 그리하여 에서는 나중에 미련하게 하나님의 복을 가벼이 여겼고, 그 복을 동생 야곱에게 빼앗겼다. 후에 야곱의 자손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지금까지 살아남아 이스라엘 국가가 되었으나, 에서의 자손 에돔 족속은 기를 쓰고 세상에서 살아남으려 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셨다. 로마서 저자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이 불의하지 않다 했다. 자기 자손이 계속 살아남아 국가로 존속하는 복을 받은 자가 야곱 말고 누가 있는가? 에서가 야곱처럼 특별대우 받아야 할 근거가 있는가? 없지 않은가? 또한 에돔이 멸망한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불의하신 게 아니지 않은가?

이 땅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는 말과 같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자들은 더욱 더 자기를 선택해 주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은혜를 망각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자들이 있다면, 그분께서는 선택받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사라진 수많은 자들을 기억하시며 이런 생각을 하실 것이다: '죄 안 지었는데도 나에게 택함 받지 못해 세상에서 사라진 자들도 저렇게 많은데, 왜 내가 너와 네 자손을 계속 돌봐야 하지?'

사울 왕을 보라. 애당초 그는 자신의 선행으로 왕으로 선택받은 게 아니다. 저가 처음에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왕이 되었으나,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변질되어 불순종하니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고,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우셨다. 황새 부모가 선택받지 못한 새끼 머리를 계속적으로 쪼아 죽이듯 하나님께서는 사울 집안을 지속적으로 벌을 내리시어 망하게 하셨다.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은 전쟁에서 죽었고, 후에 기브온 족속과 관련된 일로 사울 집안 남자 7명이 죽었고(삼하21:2-9), 사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이스보셋은 낮잠을 자다 살해되었다(삼하4:7). 사울 집안은 메시야를 탄생시킬 다윗 집안의 번영을 위해 제거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에는 사울의 경우처럼 행위와 관련된 후천적 선택도 있다. 시편은 거듭하여 의인과 그 자손이 땅을 차지하고 악인과 그 자손은 땅에서 제거될 것이라 경고한다.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시37:27-29)"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과 버림에 큰 두려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위의 시편 말씀에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그 자손이 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을 거라 확실히 약속하신다. 또한 그분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희생제물로 사용하셨음을 안다. 이런 분의 선택과 버림이라면 그 공정함은 신뢰할 만하고, 또한 여기에는 아무런 불의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구원과 영생의 문제'보다는 '땅을 차지하고 사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공의로우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택함받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자들에게 사후에 어떤 배려를 해주실 거라 기대를 해본다. 공평한 분이 아니신가?

이 글을 쓰는 것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아 큰 은혜를 입고 이 땅에 살면서 정말로 미련하게 정신줄 놓고 제멋대로 사는 자들이 너무 많아 한심해 보였기 때문이다. 간음, 도적질, 사기질, 폭력, 거짓말 등을 하며 사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계기가 아닌가?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목사가 돼가지고 교회 돈 횡령하고, 학위 돈 주고 사고, 선거 부정 일으키고, 간음하고, 교회 세습을 하는 것이 얼마나 당신 자신과 자손에게 악한 영향을 끼칠지 모르겠으면 사울 집안을 보며 깨닫기 바란다. 그렇게 겁도 없이 죄짓고 살다가 크게 후회할 날 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항상 선택받지 못한 자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절대 삶의 현장에서 불평불만이 있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경외함만이 있게 된다. 성경은 우리에게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고, 항상 그분을 경외하라 권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