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설교(딤전6:11-16) : 우리의 관심사

stevision 2012. 11. 28. 09:30

 

(2007년 8월 29일 동아 시사 발언대에 올린 글)

 

제목: 우리의 관심사                                     English
말씀: 딤전6:11-16

  

 

>>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

성경에 미련한 자의 마음은 잔칫집에 가 있고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가 있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다 그렇고 그렇게 삽니다. 뭔가 폼나는 삶을 사는 자들은 천 명 중에 한 둘 정도입니다. 이름을 좀 날리며 살기 때문에 그 정도로라도 평가해 주는 겁니다. 좋은 대기업에 입사했더라도 앞으로의 문제가 더 태산같습니다. 10년도 못가 그 회사를 떠나야 하는 자들이 태반인데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막막하지 않습니까? 판사나 검사 됐다고 동네잔치 벌여도 10년 이후로도 검사나 판사랍니까? 미련한 자는 일단 일에 성공해놓고 긴장을 확 풀고 잔치를 벌이며 살다 졸지에 좋았던 생계수단 잃고 한숨지며 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자는 앞날의 불확실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합니다. 혹시 그가 기존의 생계수단을 잃게 되더라도 그런 자에게는 그 일이 더 높은 계단으로 오르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참으로 빨리 지나간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TV에 얼굴을 비치던 유명한 정치인들이나 경제인들이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졌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남한 TV에 나왔던 얼굴들이 영원히 사라진 경우가 몇이 있더군요. 여러분, 그런 분들을 보시며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 세상에 관심을 두고 사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 실감나십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여러분께서 지혜로우신 분이시라면 여러분께서는 자신들의 죽음을 직시하며 영생(永生)에 관심을 가지실 겁니다. 여러분이 어리석은 자들이라면 힘들여 벌어놓은 돈 펑펑 써대고 매일 잔치를 벌이고 살다가 죽을 생각을 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세월이 너무 빨리 흐르고 인간의 수명은 너무 짧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제자요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해주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먼저 디모데에게 피해야 할 관심사를 말해줍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11절).” 여기서 이것들이란 바로 직전에 한 말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바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라는 말씀입니다. 솔직한 말로 저도 돈을 좋아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 그 누가 돈 싫어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돈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주요 관심사가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다가오면 자기 소유로 만들려 하고 사랑하는 자가 떠나면 슬퍼 울겠지요. 나에게 사랑하는 자가 생기면 다른 자가 우리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께서 돈 몇 푼 잃어버렸다고 울면 하나님께서 매우 섭섭해하십니다. “너 교회 일 때문에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던데, 너 돈은 그렇게 중요하냐?”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여러분의 돈을 보며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돈과 여러분 사이를 갈라놓는 것을 정말 싫어합니다. 헌금 낼 때 돈과 생이별하는 것이 가슴아파 속으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는 분 계십니까? 이제 유치원생 믿음을 버릴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의 대표적 성품은 엄마보다 돈을 더 좋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헌금을 준비하고 헌금을 정성스럽게 드리는 가운데 정말로 기쁨을 누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을 떠나 우리가 하나님께 헌금을 드릴 때 참으로 큰 기쁨이 마음에 넘쳐흐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돈이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는 방법이 하나 있긴 합니다. 좋아하는 자가 가까이 오래 머물러 있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내 금고에 쌓아두면 나는 돈을 사랑하게 됩니다. 돈이 들어오기가 무섭게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하면 돈을 사랑할 겨를이 없지요. 여러분, 적당히 돈을 모으셨으면 지금부터 들어오는 돈은 맘껏 선한 일을 위해 사용하십시오. 그러면 돈이 여러분을 존경(?)하여 뒤따라오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귀히 보시고 더욱 사랑해주십니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11절)” 말합니다. 이 시대 우리가 정말로 추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와 같은 것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탐욕, 특히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마귀는 돈의 권세와 매력을 무기 삼아 많은 자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돈을 사랑하면 마귀를 사랑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일이지요. 우리는 의(義)를 좇아야 합니다. 권세잡은 자들은 뇌물을 멀리하고 약자를 괴롭히면 안됩니다. 부하 여직원 성추행하고 성폭행하는 자들, 그러면 안됩니다. 불의한 자들에게 후원금 받아먹고 그런 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짓을 하면 안됩니다. 동성애 정신병자 집단이나 창녀 집단에게 후원금 받아먹고 그들의 인권을 위한답시고 그런 개 같은 인간들을 위해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됩니다. 특히 언론사 기자들은 불의한 자들로부터 돈을 받고 악한 기사를 쓰면 안됩니다. 불의를 사랑함은 돈과 마귀를 사랑하는 것이고, 의를 위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의를 지키려 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특히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는 경건을 좇아야 합니다. 우리는 술, 마약, 무분별한 섹스, 도박, 변태행위, 등을 하면 절대 안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말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의 성품인 거룩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경건이 주는 기쁨에 맛을 들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를 가까이 오게 하십니다.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출33:11).” 여러분께서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시면 여러분 스스로 느끼시기에도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까이 계십니다. 너무 가까워 그분께서 여러분 마음에 살아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 세상에는 더럽고 천박한 즐거움을 주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사는 자들은 그런 세상적 즐거움이 역겹게 느껴집니다. 가을날 푸른 하늘에 눈이 시리도록 찬란한 해가 있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곡식은 익어가고, 꽃은 아름답고 향내도 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내가 있다면 기쁘고 즐겁지 않습니까? 얼마나 깨끗하고 맑은 아름다움입니까? 그것을 볼 때 나는 기쁩니다. 맑은 날 높은 산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답습니까? 그것을 보면 기쁩니다. 경건한 자는 가까이 계신 고귀하시고 깨끗하신 하나님을 보며 기뻐합니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며 그 가운데 기쁨을 누리고, 자기도 또한 존귀한 자가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출34:35).”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뵙고 대화를 나눈 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오면 언제나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광채를 감당할 수 없어 모세는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려야 했습니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형상이 온전히 회복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달이 햇빛을 받아 어둔 밤을 비추듯 경건한 자는 어둔 세상에서 달과 같이 빛을 비춥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그 자 안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금으로 만든 황금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보다 여러분의 얼굴이 거룩한 광채를 낼 때 여러분이 더 고귀하고 영광스런 존재가 됩니다. 탐욕을 버리시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시고, 경건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함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여, 경건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도 좇으시기 바랍니다(11절). 요즘 사람들 컴퓨터 시대이기 때문에 속도를 중요시합니다. 신중함, 인내, 온유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본명을 감추고 가명을 사용하는 세상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컴퓨터 시대의 인터넷 인격이 우리의 성품을 망쳐놓게 하면 안됩니다. 우리 기독교인은 이럴 때일수록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실천해야 합니다. 인터넷 세상은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신앙으로 무장하여 공개적으로 복음을 담대히 전하면 많은 자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순수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사악한 이단 교주들에 의해 영과 육이 감옥에 갇혀 있던 자들에게 우리는 참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참복음으로 무장하여 인터넷 대화 광장에서 사악한 이단들의 궤변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인터넷에서도 경건을 추구해야 합니다. 음란싸이트 방문하여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마시고 인터넷 도처에 산재해 있는 아름다운 하나님 말씀을 찾아다니는 자들이 되십시오. 양들이 푸른 풀과 맑은 시냇물을 찾듯이. 대화 마당에서 비기독교인 가면을 쓰고 막가파 네티즌이 되지 마시고 예수님을 전하고 영생을 전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우리가 믿음을 좇을 때 우리는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 땅에서의 짧은 영광보다는 천국에서의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고 삽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배하셨느니라(히11:13-16).” 그러니까 믿음을 좇아 사는 자는 이 땅에서 ‘나그네 의식’을 갖고 사는 자입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나그네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나그네는 자기 전 재산을 들여 남의 땅에 집을 지어놓고는 다 빼앗겨버립니다. 여러분, 이 땅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입니다. 어리석게 투자금 다 날리지 마시고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으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나그네는 이 땅에 살면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영생을 취하는 자(12절)”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나그네는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에 점도 없고 책망받을 일도 없게 자신의 삶과 마음을 지키는 자(14절)”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생보다 더 중한 관심사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본문 15절, 16절 말씀은 하나님을 만난 바울이 자신의 체험을 제자 디모데에게 해주는 말입니다. “...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15, 16절).”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으나 그 때에 예수께서는 엄청난 빛 가운데 계셨고, 바울은 그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보지 못했으나 그분의 음성은 들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가까이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한 말에서 바울 그 자신도 하나님의 실체 자체를 보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뵐 때 교만해질까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빛이나 흑암이나(출20:21) 구름이나 불을 두십니다. 또 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빛 자체나 구름 자체나 불 자체가 아니십니다. 인간이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말입니다. 단 그분께서는 오히려 인간과 당신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는 빛이나 어둠을 통해 당신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을 가리는 수단이 역설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되는 거지요. 제가 볼 때 구약에서 하나님의 현존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표현되는 밝고 위엄 있는 빛인 것 같습니다. 이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속에 나타난 것을 이스라엘인들이 보았습니다(출16:10). 제가 꿈속에 자주 본 것도 바로 구름 사이에 있는 밝은 빛입니다. 그것은 해처럼 생겼으나 변화무상했습니다. 어떤 때는 따스하고 아름다운 빛을 내는 투명하고 영롱한 둥근 수정 덩어리 같기도 했습니다. 아침 해돋이의 장관 같기도 하고 저녁 낙조의 장관 같기도 한 아름다운 빛의 연기(演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아름답고 황홀합니다. 어떤 때는 꿈에 보통의 정오의 해보다 백 배나 더 큰 해가 강한 빛을 발하기도 합니다. 사도 요한이 영광 중에 계신 예수님을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1:16)”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니 꿈속의 해는 예수님의 얼굴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닐 듯 싶습니다. 비둘기가 성령을 상징하듯 해는 하나님의 영광이나 예수님의 얼굴을 상징합니다. 어떤 때에는 구름 사이에서 밝고 아름다운 해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세 번 하더니 한꺼번에 세 해들이 일직선으로 나타나더군요. 아마 삼위일체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신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꿈속에 여러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셨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지금 위로해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만나고 보신 것입니다. 제게 꼭 위로와 격려가 필요한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해 당신의 영광을 제게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지켜보고 있지 않느냐? 힘을 내거라’라는 뜻이겠지요. 단순한 꿈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룩한 위엄이 그 빛에 서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신 분들은 제 말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우와!’라는 탄성이 저절로 나옵니다. (또한 언젠가 저는 흰 비둘기 한 마리가 제 오른쪽 어깨에 앉아 부리로 제 얼굴을 비벼대는 꿈을 꿨습니다. 혹시 성령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은 아니었을까요? 겸손한 마음으로 그 꿈을 해석한다면 얼마나 큰 힘과 위로를 주는 꿈입니까?)

바울은 목회 현장에서 지쳐있는 제자 디모데 목사에게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말해줍니다. 하나님 바라보고 더욱 힘을 내어 용기를 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하시고 힘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김종택(동토마햇빛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