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12. 31. 동아 시사 발언대)
석가모니가 태어나자 마자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했다 한다. 스스로에 대해 인간으로서 자존심을 갖는 것은 정당하고 바람직한 일이나 타인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창조주의 개념을 전혀 배제한 채 그런 말을 하면 지독한 주관주의의 마력에 빠져 진정한 진리를 놓치게 된다. 불교인들은 먼저 자기중심적인 철학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진리는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만족시킨다.
불교는 공허한 철학이다. 자신의 존재나 자신 밖의 삼라만상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확증할 수 없다고 불교철학은 주장한다. 이렇게 대상의 존재의 불확실성을 불교는 '무(無)'라 규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쓸데없는 철학이다. 인간의 삶은 자신의 존재와 세상의 존재를 긍정하면서 시작된다. 이 단계가 바로 똥 오줌을 가리는 유년기의 인간이다. 언제까지 세상의 존재를 증명하다 생을 다 마칠 것인가? 그리고 만물의 궁극적 실체가 무라 하면 도대체 거기서 무슨 유익한 인생관이 나오는가? 공허함과 무를 찬양한들 그것으로부터 허무한 메아리조차도 되돌아오지 않는다.
불교는 혼돈 그 자체이다. 지독한 주관주의에 빠진 불교는 모든 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같은 물이라도 해골에 담긴 것을 보고 인간이 더럽게 여기고, 똑같은 물인데도 찻잔에 담긴 것을 귀하게 본다는 것이다. 일리있는 말이나 실제 인간의 삶은 그처럼 간단하지 않다. 귀한 손님에게 해골바가지에 담아 물을 줘봐라. 그날로 인간관계 끝이다. 아마 법주사 주지스님도 해골바가지에 물을 안마실걸? 그런 쓸데없는 철학을 진리로 인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들이 자기 최면에 빠지려고 노력하며 세월을 보내다 환각중에 만물의 차이가 없음을 감지하나? 그러고 나서 해탈이라고 자랑한들 소위 해탈이라는 것이 30분이나 갈까? 지독한 주관주의에 빠져 만물의 차이를 거부하면 지독한 혼돈에 빠진다.
불교는 검증되지 않은 윤회설 때문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된다. 정신이 혼미한 두꺼비가 자기 집에 자주 출몰하면 그집 사람들은 그 두꺼비가 죽은 조상이 환생하여 온 것으로 믿고 그 두꺼비에게 절을 한다. 인간이 정신나간 두꺼비에게 절하는 것이 바로 혼돈이다. 어린 아이가 옛날 고승의 흉내를 내면 사람들은 그 어린 아이가 옛날 고승이 환생하여 나온 자로 알고 절한다. 어른들이 아이에게 절하는 것이 바로 혼돈이다. 왜 이런 혼돈이 생길까? 불교에 바른 신관(神觀)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맨 먼저 어떤 말로 시작하나?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처럼 기독교는 이 땅의 혼돈과 공허를 극복하며 시작한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계시는 곳마다 혼돈과 공허가 극복된다. 하나님을 마음에 둔 자마다 무(無)의 공허함이 극복되고 진선미의 근원이신 하나님 때문에 마음에 진선미가 가득차게 된다. 하나님을 마음에 둔 자마다 거룩함이 뭔지 알고 진정한 가치가 뭔지 알게 되어 질서 있는 삶을 살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가까운 것을 거룩하고 귀한 것으로 보며 하나님의 속성에 배치되는 것을 천하고 더러운 것으로 본다.
개인과 사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혼돈과 공허가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이 임하시면 그 혼돈과 공허가 극복된다. 불교가 무신론적 인생관을 가진 자들에게 큰 지혜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러한 불교철학은 참진리가 아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지혜로 쌓은 이 불교철학을 극복하면서 인간 구원을 말한다.
불교의 구원관은 진리를 깨달아 해탈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라 한다. 부처라면 불교의 최고 존재자 아닌가? 이런 불교 진리를 수호하는 영물이 바로 용이다. 인간이 최고존재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용이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의 용(혹은 뱀)은 사탄을 상징한다. 그 뱀이 어떻게 인간을 타락하게 만들었나?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사탄이 거짓말을 늘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용의 교리가 거짓임을 명백히 선언한다.
기독교의 상징은 십자가이다. 불교의 상징은 만(卍)자 이다. 십자가는 엄연한 객관적인 세상이 있음을 상징한다. 자신이 아무리 득도를 하여 깨달아도 자신이 지은 죄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 앞에 지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십자가(十)가 말해주는 진리이다. 십자가는 객관적 형벌을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거부하면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객관적 진리를 거부하는 것이 바로 불교교리이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거부하고 개인의 깨달음으로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불교가 만(卍)자를 자신의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불교가 기독교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수천만의 인명을 앗아간 독일의 나찌의 상징은 어떠한가?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 불교 상징과 닮았나? 나찌는 기독교 국가이면서도 기독교의 상징인 사랑을 짓밟은 독일의 독재당이다. 불교는 이론적 사탄이고, 독일의 나찌당은 실천적 사탄이었던 것이다. 이 둘은 십자가가 상징하는 기독교의 가치와 진리를 짓밟고 있다. 불교의 모 스님이 사탄이 자신들의 주인이라고 설법한 적이 있다고 내가 들은 적이 있다. 물론 그분이야 자신이 신과 사탄의 구별을 극복했음을 과시하려고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주장한 것 중에 나의 무식함과 오해에서 비롯된 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로 맞는 말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것은 불교를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교인에게 진리의 다른 측면을 고려하여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라 말해주기 위함이다. 일부 스님들께서 진리가 하나이고 불교와 기독교도 같은 진리라고 주장하는 낯뜨거운 주장을 접하며 '그게 아닌데'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올렸다.